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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이론의 발전(화학사 돌아보기 - Part.18 )


19세기 초만 해도 유기 화합물을 분류하고 설명하는 일은 요원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1830년을 전후하여 유기

화합물을 높은 정확도로 분석하는 방법들이 개발되면서 유기 화합물에 대한 설명도 여럿 등장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론들은 중구난방이었고, 이론으로 설명되지 않는 실험 결과가 계속해서 발견되었습니다. 뵐러는 1835년 유기 이론 연구에 대해“ 거의 아무런 길도 나있지 않은 어두운 숲” 과 같다고 고백했죠. 유기 화합물을 분류하는 방법 역시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깔끔하게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규칙은 없었죠. 로랑은 1844년 난무하는 분류법들에 넌더리를 내며“ 산은 산이요, 염기는 염기로다. 색을 띠면 염료이고,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이런 어두운 시기에도 유기 이론은 조금씩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바로 그 과정을 추적해 보고자 합니다. 예전 글과 내용이 조금 겹칩니다만, 뒤마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참고문헌 1]

뒤마는 유기 화합물의 분류에 큰 관심이 있었습니다. [참고문헌 2] 비히와 뒤마 등이 개발한 여러 분석법 덕분에 당시 다양한 유기 화합물 내의 원소 질량비 데이터가 빠른 속도로 쌓이고 있었고, 뒤마는 이 데이터를 이용하여 유기 화합물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자 하였습니다. 에터, 아마이드 등 특정한 화합물의 분류에서 시작된 그의 연구는 이내 보편적인 이론 탐구로 확장되었습니다. 그는 전기화학적 이원론에 기반한 라디칼 이론을 이용해 유기 화합물을 설명하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핵심은 유기 물질을 두 덩어리로 쪼개서 이해하는 것으로, 당시 잘 알려진 무기 화합물들처럼 전기적으로 양성을 띠고 있는 덩어리와 음성을 띠고 있는 덩어리가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이 이론의 귀결은 유기 화합물 내에서 비슷한 성질의 덩어리끼리 치환될 수 있다는 것이었고, 뒤마는 실제로 이 원리를 이용하여 여러 실험 결과를 설명했습니다. 이를 치환 이론(substitution theory)이라 부릅니다. 당시 연구가 잘 정립되어 있었던 무기 화합물의 형성 원리를 많이 차용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뒤마는 전기화학적 성질이 정반대인 두 원소, 수소와 염소가 아세트산과 트라이클로로아세트산이라는 비슷한 성질의 화합물을 형성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지금까지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이 내용을 보고하는 1839년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유기화학에서는, 수소의 자리에 동일한 부피의 염소, 브로민, 아이오딘이 도입될 때조차 유지되는 유형(types)들이 존재한다.” 뒤마의 표현을 그대로 옮겨 보자면 C8H8O4라는 실험식을 갖는 아세트산과 C8(H2,Cl6)O4라는 실험식을 갖는 트라이클로로아세트산[참고문헌 3]은 A8B8C4라는 동일한 유형에 속한 분자들인 것입니다. 하지만 뒤마는 이내 이론적 논쟁에 흥미를 잃고 1840년경부터 응용 연구로 방향을 전환합니다.

리비히와 뵐러 역시 비슷한 시기에 이론을 포기하죠. 리비히, 뒤마, 뵐러와 같은 화학계의 거장들이 속속 이론

연구를 떠나는 와중에도, 유기 화합물을 설명하고자 끝까지 남아 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뒤마의 제자였던 오귀스트 로랑(Auguste Laurent, 1807-1853), 원래 리비히의 제자였지만 리비히의 소개로 뒤마에게 가서 연구를 배운 샤를 게르하르트(Charles Frédéric Gerhardt, 1816-1856), 뵐러와 로베르트 분젠(Robert Bunsen, 1811-1899)의 제자였던 헤르만 콜베(Hermann Kolbe, 1818-1884) 등이 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유기 화합물을 분류하고 설명하는 일에 스승들과는 달리 끝까지 관심을 잃지 않았고, 유형 이론의 형성과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로랑은 1830년부터 1832년까지 뒤마의 연구실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유기 이론 연구를 처음

접하고 깊은 관심을 갖게 됩니다. 이후 독립적인 연구자가 된 로랑은 1835년 새로운 이론을 제창합니다. 그는 탄

소와 수소로만 구성된 나프탈렌을“ 근본 라디칼(fundamental radical)”이라 부르고, 그 유도체들을 “유도 라디

칼(derived radical)”이라 불러 동일한 탄소 틀을 공유하는 유기 물질들을 하나의 그룹으로 묶었습니다.[침고문헌 4] 이로써 “덩어리”의 치환을 통해 여러 유기 반응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당시만 해도 로랑은 자신이 전기화학적 이원론을 반박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확장하고 있다고 생각했죠.

한편 게르하르트는 1838년 뒤마의 연구실에서 최초의 유기 이론 논문을 작성한 후 이론 연구에 흥미를 갖게 됩

니다. 그는 이 시기부터 여러 가지 흥미로운 태도를 보여주는데요, 먼저 그는 화학을 논하기 위해 화학 외의 다른

학문(예를 들어 물리학)을 도입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습니다. 이는 물리학과 화학은 별개의 학문이라고 단언했

던 18세기의 화학자 슈탈의 사상을 떠오르게 합니다. 또한 그는 유기 화합물은 하나의 단위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단위체의 핵심 요소는 탄소였고, 화학 반응은 일부 원자가 치환될 뿐이었죠. 베르셀리

우스 이후 많은 화학자들이 두 개의 단위를 중심으로 생각했던 것과는 큰 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참고문헌 5] 이러한 게르하르트의 관점은 로랑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1839년 앞서 소개한 아세트산의 치환 반응이 알려지면서 로랑의 이론에 따르면 전기화학적 이원론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무기 화합물에서는 양전하를 띠는 수소와 음전하를 띠는 염소가 서로 치환될 수 있다

면 무기 화합물의“ 전하” 개념이 여기서는 적용되지 않는 셈이니까요. 로랑과 게르하르트는 1839년경부터 베르셀리우스의 전기화학적 이원론과 리비히의 라디칼 이론을 적극적으로 반박하기 시작합니다. 라디칼 이론에 대한 그들의 불만은 라디칼이 한 번도 따로 추출된 적이 없고, 이론의 편의를 위해 가상으로 만들어낸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로랑은 리비히의 논문에서 111개(!)나 되는 가상의 라디칼을 찾아내고 혀를 내둘렀습니다.[참고문헌 6] 게르하르트는 리비히가 주장한 진정한“ 라디칼”, 즉 반응 전후에 변하지 않는 덩어리는 탄소뿐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베르셀리우스와 리비히, 뒤마는 계속해서 이 젊은 유기화학자들의 공격에 대응했지만, 점차 무대에서 밀려나게 됩니다.[참고문헌 7]

한편, 콜베는 1840년대 중반부터 여러 실험 결과를 발표하였는데, 그는 라디칼 이론에 기반하여 라디칼을 따로

추출해내는 데 성공했다고 해석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1851년 아세트산을 전기분해하여 탄소와 수소로만 이루어진 물질을 얻었음을 보고합니다. 그는 메틸 라디칼을 추출해냈다고 생각했죠. 로랑과 게르하르트는 콜베의 해석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콜베의 아세트산 실험에서 실제로 일어난 반응은 카복실기와 메틸기의 치환 반응이고, 콜베가 얻은 물질은 메틸기 두 개가 결합한 물질이라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근거 없이는 라디칼 이

론(콜베)과 유형 이론(로랑, 게르하르트) 중 어느 해석이 맞는지 밝히기 어려웠고, 논쟁은 계속되었습니다.

여기서 영국 화학자 윌리엄슨(Alexander Williamson, 1824-1904)을 소개해야겠습니다. 그는 어렸을 적 앓은

병 때문에 오른쪽 눈을 잃었고 왼팔도 자유롭게 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노력하여 리비히 밑에서 1845

년 박사학위를 받았고,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 프랑스에 가서 3년을 지내며 로랑 및 게르하르트와 교류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사회가 장애에 상당히 부정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1849년,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교수

가 됩니다. 이 윌리엄슨이 1850년 새로운 에터 합성법을 발표하는데, 이 반응은 서로 다른 두 라디칼을 붙여서 비

대칭적인 에터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참고문헌 8] 여기서 자세한 내용을 소개할 수는 없지만, 당시 이 연구는 로랑-게르하르트 이론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연구로 간주되었습니다. 이후 5년 동안 로랑-게르하르트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많은 실험 결과가 쏟아져 나왔고, 1850년대 중반이 되면 유형 이론은 반박할 수 없는 이론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1853년, 게르하르트는 유기 화합물에는 다음과 같은 네가지 유형이 존재한다고 정리하였습니다.


그는 모든 유기 화합물은 각 유형의 수소를 다른 라디칼로 치환할 때 얻어진다고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물 유형

에서 하나의 수소가 에틸 라디칼(C2H5)로 바뀐다면 에틸알코올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에틸기 대신 C2H3O가 들어

온다면 아세트산이 되죠. 또한 두 수소가 다 라디칼로 치환되면 윌리엄슨의 에터 합성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게

르하르트는 여기에 더하여 화학 반응을 설명하기 위해 잔기(residue)라는 용어를 도입합니다. 두 가지 복잡한 분

자가 결합될 때, 물처럼 단순한 분자가 하나 빠지면서 두 분자가 결합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단순한 분자가 빠져나

가고 남은 부분을 “잔기”라고 불렀고,[참고문헌 9] 두 잔기가 이루고있는 분자는 단일한 분자가 된다고 보았습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비록 우리가 알고 있는 분자의 구조식과 유사하지만, 이 “유형”은 실제 분자의 구조를 나타내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당시에는 원자의 실존성이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게르하르트는 분자의 구성

에 대한 신비는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고, 그가 유형 이론을 정리한 목적은 단순히 유기 화합물의 조

성을 쉽게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유형 이론의 성공을 목도한 사람들 중에는 이것이 실제 분자의 구조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믿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콜베가 대표적인 인물이었죠.

콜베는 처음 유기 이론 연구에 뛰어들었을 때부터 이 이론이 실재를 반영한다고 믿었고, 이러한 믿음 위에서 연

구를 지속했습니다. 콜베는 1850년경 범람하고 있던 수많은 라디칼들을 더 쪼개서 단순한 라디칼들로 정리했습

니다. 예를 들어 그는 아세틸 라디칼 C4H3를 메틸 라디칼 C2H3와 탄소 C2로 쪼개서 보았고,[참고문헌 10] 여기 추가된 두 개의 탄소 때문에 아세틸 라디칼의 반응성이 나타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라디칼을 세 가지 종류로 정리했습니다. 수소 라디칼, 아세틸 라디칼, 에틸렌 라디칼이 그들이었습니다. 이들이 기본적인 단위이고, 수소를 더하거나 뺌으로써 다른 라디칼들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1850년대를 거치면서 여러 실험적 사실이 추가되었고, 콜베의 이론 역시 조금씩 수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라디칼들이 실제로 분자 내부에 존재한다는 그의 철학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콜베와 그의 입장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이후 유기 이론의 발전을 이끌게 됩니다.

글을 마치기 전에, 오늘 등장인물 중 한 명과 얽힌 재미있는 번외 이야기를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그 유명한 이

토 히로부미(伊藤 博文, 1841-1909)의 대학 전공이 “화학”, 그것도 분석화학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이

토 히로부미의 지도교수가 바로 윌리엄슨이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아직 일본에 쇄국령이 엄중하게 내려져 있

던 1863년, 네 명의 동료와 함께 서양 문물을 배우기 위해 몰래 영국으로 떠납니다. 11월 4일에 런던에 도착한 그들 은 밀항을 도와준 영국 무역 회사 사장의 소개로 당시 런던 화학회 회장을 맡고 있던 윌리엄슨을 만납니다. 친절하고 겸손한 사람이었던 윌리엄슨은 낯선 이방인들을 기꺼이 자신의 집에 묵게 해주었고, 그들이 본인이 재직하고 있던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입학시험을 치르지 않고도 수업을 들을 수 있게 행정 절차를 처리해 주었습니다.

다섯 명의 일본인은 분석화학을 전공으로 삼아 수업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윌리엄슨 교수가 당시 분석화학 교수

였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죠. 그런데 이듬해, 런던에서 서양 학문을 만끽하며 즐거운 생활을 하던 이들에

게 일본이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서양 나라들과 외교적인 마찰이 있었고, 심지어 전쟁까지 일어날

수도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와 다른 한 명은 즉각 귀국을 결정하여 1864년 7월에 일본에 도착합니다. 반면 나머지 세 명은 남아서 공부를 이어갔고, 병사한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이후 귀국하여 일본 근대화에 큰 역할을 감당합니다. 그 이후 일본에서는 계속해서 영국으로 유학생들을 보냈고, 윌리엄슨은 이들을 계속해서 챙겼을 뿐 아니라, 본인의 제자들을 일본에 교수로 파견하기도 하였습니다. 비록 이토 히로부미가 이후 화학 지식을 어떻게 써먹었다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재미있는 역사적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참고문헌 11]

오늘 글에서는 유기 화합물들을 잘 분류해 보겠다는 열망이 어떻게 라디칼 이론과 유형 이론의 발전으로 이어졌

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특히 이 시기에는 구세대와 신세대의 대결이 상당히 드라마틱하게 드러납니다. 베르셀리

우스와 게이뤼삭이 이끄는 세대는 뒤마, 리비히, 뵐러 등이 주도하는 다음 세대와 논쟁 끝에 물러갔고, 이 신세대

는 다시 구세대가 되어 로랑과 게르하르트의 새로운 세대와 대결을 펼칩니다. 그리고 로랑과 게르하르트는 콜베로

대표되는 그 다음 세대와 치열한 공박을 주고받죠.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콜베 이후에도 유기 화합물의 구성에

관한 새로운 아이디어가 계속 튀어나왔고, 우리는 다음 글에서 이 이야기를 계속 추적해 나가고자 합니다.



참고문헌

  1. 이 내용은 다음 글들에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Alan J. Rocke, “The Theory of Chemical Structure and Its Applications” in The Cambridge History of Science, Volume 5: The Modern Physical and Mathematical Sciences, ed. Mary Jo Nye (Cambridge, United Kingdom: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 Hans-Werner Schütt, “Chemical Atomism and Chemical Classification” in The Cambridge History of Science, Volume 5: The Modern Physical and Mathematical Sciences, ed. Mary Jo Nye (Cambridge, United Kingdom: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 N. W. Fisher, “Organic Classification before Kekulé,” Ambix 20 (2): 106-131 (1973); N. W. Fisher, “Organic Classification before Kekulé: Part 2,” Ambix 20 (3): 209-233 (1973).

  2. 뒤마의 연구에 대한 꼼꼼한 분석은 다음 논문을 참조하십시오. Satish C. Kapoor, “Dumas and Organic Classification,” Ambix 16 (1-2): 1-65 (1969).

  3. 당시에는 실험식의 첨자를 아랫첨자보다 윗첨자로 쓰는 것이 관행이었습니다. 또한 원자량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뒤마의 분자식은 지금의 분자식과 많이 다릅니다.

  4. 이 “라디칼”이라는 단어는 리비히가 정의한 “라디칼”과 혼동을 일으킬 수 있었으므로, 훗날 로랑은 대신 “핵(nucleus)”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습니다.

  5. 거슬러 올라가면 화학 혁명 시기에 합성주의에 밀려났던 요소주의의 부활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6. John Hedley Brooke, “Laurent, Gerhardt, and the Philosophy of Chemistry,” Historical Studies in the Physical Sciences 6: 405-429 (1975).

  7. 베르셀리우스는 1848년 사망했고, 리비히와 뒤마는 1840년경부터 이론 연구에서 손을 뗍니다.

  8. 이 반응은 지금도 학부 유기화학 교과서에서 소개될 정도로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9. 오늘날 이 “잔기”라는 용어는 여전히 폴리펩타이드의 단위체를 가리킬 때 사용되고 있습니다.

  10. 역시 원자량 문제로 인해 탄소의 수가 오늘날 알고 있는 수의 두 배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11. Takaaki Inuzuka, Alexander Williamson: A Victorian Chemist and the Making of Modern Japan, translated by Haruko Laurie (London, United Kingdom: UCL Press, 2021).








최정모 Jeong-Mo Choi


• 한국과학기술원 화학과, 학사(2003.3-2011.8)

• Harvard University 과학사학과, 석사

(2011.9-2015.5, 지도교수 : Naomi Oreskes)

• Harvard University 화학 및 화학생물학과, 박사 (2011.9-2016.5, 지도교수 : Eugene I. Shakhnovich)

• Washington University in St. Louis, 박사 후 연구원(2016.8-2019.4, 지 도교수 : Rohit V. Pappu)

• 한국과학기술원 자연과학연구소, 연구조교수(2019.6-2020.8)

• 부산대학교 화학과, 조교수(2020.9-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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