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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히의 왕국 <화학사 돌아보기 Part.17>


19세기를 거치면서 유럽 과학의 지형은 많이 변화하게 됩니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독일의 부상입니다. 19세기 초 독일은 프랑스에 한참 뒤쳐진 나라였지만, 19세기 말이 되면 세계 과학을 선도하는 국가로 우뚝 서게 됩니다. 통계로 보면 보다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1800-1825년의 기간 동안 프랑스와 독일에서 간행된 화학 논문 수를 비교하면 독일의 논문 수는 프랑스의 절반 밖에 되지 않았지만, 1870년대가 되면 독일은 프랑스보다 세 배 이상의 화학 논문을 생산해냅니다. 이러한 변화를 이끈 사람 중 하나가 바로 리비히(Justus von Liebig, 1803-1873)입니다. 오늘 글에서는 이 시기 독일 과학이 급성장하게 된 배경을 살펴본 후, 그 과정에서 리비히의 연구실이 어떠한 역할을 수행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1]

19세기 독일 과학의 발흥은 많은 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던 주제입니다.[2] 원래 19세기 초 유럽 과학을 선도하고 있었던 국가는 프랑스였습니다. 계몽주의에 깊이 경도되어 있던 프랑스는 사회의 혼란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합리성에 근거한 과학밖에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위하여 정부 차원에서 강력하게 과학을 지원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체계적인 과학 교육을 위해 대학 시스템을 개혁하였고, 많은 연구소를 세웠으며, 이들 기관에 우수한 실험실과 장비, 자연사 박물관, 천문대 등을 지원하였습니다.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프랑스는 유럽 과학의 선두에 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의 시스템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먼저 프랑스 정부는 각 대학과 연구소의 목적을 명확히 정하였고, 같은 목적을 가진 대학과 연구소를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자원을 집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한편 한 번 기득권을 가진 기관은 현 상황에 안주하고 더이상 발전하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또한 당시 프랑스 학계는 다양한 분야를 두루 아는 제너럴리스트(generalist)를 추구하였고, 이는 점차 분야별 전문화가 진행되고 있던 당시 과학의 추세에 역행하는 것이었습니다.[3] 그러나 무엇보다 과학자 개인에게 있어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대학과 연구소에서 연구자들에게 충분한 봉급을 제공하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에서 과학은 수입을 얻기 위한 천박한 활동이 아니라 내 돈을 들여서 수행하는 신성한 활동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연구하는 직업이 아니라 가르치는 직업인 교수는 봉급을 받았지만, 교수 자리는 매우 한정적이었죠.“ 결론적으로 1850년대에 이르러서도 프랑스에서 과학을 전문직업으로서 추구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학문적으로 성공한 사람들도 40대 말이나 50대의 나이에 겨우 교수직에 임명될 수 있었다.”[4]

한편, 19세기 초 독일의 상황은 어땠을까요? 나폴레옹 전쟁(1803-1815)에서 패배한 독일 역시 대학 개혁을 시도합니다. 그런데 그 방향은 독일의 민족 의식을 고양하는 방향이었고, 이에 호응한“ 낭만주의자”들이 강단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철학의 위상은 높아지고 경험 과학의 위상은 떨어졌죠. 게다가 강력한 중앙 정부가 없었던 독일 지역의 대학들은 정부로부터의 막대한 지원도 기대할 수 없었죠. 여러모로 과학이 발전하기 적합한 토양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대학 시스템이 강력한 중앙 집권제가 아니었다는 점이 도리어 이후 독일 과학의 발전에 큰 장점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독일에서는 학생이나 교수나 더 나은 대학을 찾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대학들은 학문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서로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한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혁신을 이룬다면, 다른 대학들이 이내 그 혁신을 모방하여 발전시키곤 했습니다. 한 가지가 일방적 강의 위주의 교육 대신 실험 교육과 세미나가 도입된 것이었습니다. 또한 대학 간 경쟁으로 인해 과학자들에 대한 대우도 자연스레 좋아졌습니다. 이제 독일 과학자들은 과학을 전문 직업으로 가질 수 있었고, 특정 분야의 전문가로 인정받기만 한다면 그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을 찾고 있는 여러 대학에서 러브콜을 받을 수 있었죠. 그 결과 독일에서는 대학 연구실들이 연구 활동의 중심 역할을 수행하면서 과학 발전을 추동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이제 우리의 주인공인 리비히에게로 돌아가보겠습니다. 리비히 이전에도 개인 차원에서 개혁적인 연구실을 시도한 독일 화학자들은 많이있었습니다. 약사들을 체계적으로 훈련하기 위해 화학 및 약학 연구소를 설립한 에어푸르트 대학의 트롬스도르프(Johann Trommsdorff, 1770-1837), 독일에서 최초로 대학 내 실험 교육을 시작한 괴팅겐 대학의 스트로마이어(Friedrich Stromeyer, 1776-1835), 세쌍 원소(triad) 개념으로 유명한 예나 대학의 되베라이너(Johann Do¨bereiner, 1780-1849) 등이 리비히 이전부터 화학 실험실을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리비히는 이들이 일궈놓은 땅 위에 씨를 뿌려 큰 결실을 얻은 것이죠.

1824년 기센 대학교에 부임한 리비히는 실험실 공간조차 없는 비정규 화학 교수였습니다. 다행히(?) 전임자가 요절하면서 1825년 정규 교수로 임명되었습니다만, 여전히 실험실 공간은 준비되지 않았죠. 그는 트롬스도르프의 예를 따라 기센 대학교에 화학 및 약학 연구소를 설립해 줄 것을 청원했지만, 학교 이사회는 대학은 시민 교육을 하는 곳이지 약이나 비누를 제조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연마하는 곳이 아니라며 해당 청원을 기각하였습니다. 결국 리비히는 전임자가 마련해둔 공간인 오래된 막사에서 1826년 여름 두 명의 조수들과 함께 조그만 실험실을 시작합니다. 설립 당시 이 실험실은 당시 일반적인 화학 교수들의 실험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즉, 약사들의 약제 공간과 비슷한, 소규모 실험을 수행하는 곳으로 교수 개인이 운영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1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리비히와 그의 실험실은 당시 유럽 화학을 선도하는 연구실로 우뚝 서게 됩니다.

리비히의 성공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우선 그가 활동했던 시기에 개념적으로 유기 화합물들을 이해할 수 있는 틀이 많이 개발되고 있었습니다. 일례를 들어 베르셀리우스가 이성질 현상을 명명한 것이 1830년이죠. 당시 발견된 유기 화합물 중에는 조성이 동일한 분자들이 많았는데, 이들을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또한

“종이 도구”인 화학식이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일일이 화학 반응을 서술하는 식으로 반응을 표현했지만, 화학식을 사용하면 복잡한 유기화학 반응을 쉽고 단순하게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베르셀리우스가 화학식을 발표한 것은 1813년이었지만, 1827년을 즈음하여 그유용성이 증명되었고 그 이후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였죠.

리비히를 화학 세계의 리더로 만들어준 중요한 원인이 또 하나 있습니다. 리비히는 1832년 학술지를 하나 손에

넣습니다.『 약학 연감(Annalen der Pharmacie)』이라는 이름의 이 학술지는 리비히의 연구 발표 채널로 활용되었

습니다. 리비히와『 연감』은 서로 상승 작용을 일으켰습니다. 리비히는『 연감』을 통해 손쉽게 자신의 연구를 세상에

선보였고,『 연감』은 리비히의 명성에 기대어 권위를 쌓을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리비히가 이 학술지를 인수한지 몇

년 만에 이 학술지는 유럽 전역에서 널리 읽히는 주요 학술지로 자리매김합니다. 이 학술지는 1840년『 화학 및 약학 연감(Annalen der Chemie und Pharmacie)』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리비히 사후에는 아예『 유스투스 리비히의 화학

연감(Justus Liebigs Annalen der Chemie)』으로 이름을 바꾸었죠.

하지만 리비히가 실험실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던 데에는 마지막 퍼즐 조각이 필요합니다. 바로 리비히 본인이 개발하여 1831년 발표한 칼리구입니다. 칼리구는 간단한 조작으로 신뢰성 있는 조성 분석을 할 수 있게 해주었으므로 실험자의“ 손”을 타지 않고 일관된 데이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칼리구가 발명되기 전까지 화학자들이 유기 물질 연구에서 가장 시간과 노력을 많이 기울였던 단계가 조성 분석 단계였음을 고려해 보면, 이러한 기구가 화학 연구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만들었을지 상상해 볼 수 있겠습니다.

1830년대 초까지 리비히 실험실의 구성원은 10명을 크게 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요인들로 인해 리비히 실험실은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리비히는 1831년 클로랄(chloral)을 발견하였고, 1832년에는 뵐러와 함께 벤조일 라디칼(benzoyl radical)을 발견하였으며, 1835년에는 알데하이드(aldehyde)를 발견합니다. 또한 리비히는 연구실의 책임자로서, 급속도로 확장하는 연구실을 유지하기 위해 학교 당국과 끊임없이 교섭하였습니다. 1833년 다름슈타트(Darmstadt)로 옮기겠다고 선언한 리비히를 붙잡기 위해 기센 대학교는 그가 원하는 실험실 확장 공사를 해주어야 했죠.

그렇게 1835년을 전후하여 리비히 연구실에는 큰 변화가 찾아옵니다. 리비히의 높아진 명성 덕분에, 이전까지 약학을

전공한 학생들이 주를 이루던 실험실에 화학을 전공한 학생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독일 내에서만이 아니라 독일 밖에서도 많은 유학생이 찾아옵니다. 기센 대학교의 공식적인 지원까지 받으며 날개를 단 실험실은 1835년 이후 팀 시스템으로 운영됩니다. 즉 선배 연구자와 학생이 팀을 이루어 새로운 물질을 합성하고 그 조성을 분석하는 것입니다. 이는 화학 교육과 연구를 동시에 진행할 수 있게 해주는 시스템이었고, 연구 성과를 내는 데에도 매우 효율적이었습니다. 그 결과 리비히의 실험실은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양의 연구 결과를 쏟아낼 수 있었습니다. 이후 리비히 실험실은 급속도로 팽창하여 1843년에 이르면 최소 68명(!)의 학생들이 리비히 실험실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어찌 보면“ 공장식” 연구가 이 때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리비히의 교육 방침은 선배 교수들과 조금 달랐습니다. 그는 부임 초기부터 실험 교육을 강조하여, 하루 종일 실험을

수행하는 커리큘럼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 학생에게 연구 경험을 시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본인이 연구하고 있는 주제에서 일부를 떼어 내 학생들에게 주었고, 우선 본인이 시도하고 있던 방법론대로 따라해 보도록 한 뒤, 학생들이 해당 주제를 더 발전시키도록 지도하였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이 스스로 시도하는 단계에서도 끊임없는 토론과 피드백으로 학생들의 성장을 이끌었습니다.[5] 이를 통해 학생들은 기초적인 실험 기법을 배우는 데에서 출발하여 반독립적인 연구자로 성장하는 데까지 체계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었죠.[6] 이러한 교육-연구 프로그램이 리비히 연구실의 독특한 시스템이었고, 이후 뵐러, 분젠(Robert Bunsen, 1811-1899), 콜베(Hermann Kolbe, 1818- 1884) 등 독일 내의 연구자들과 영국, 프랑스, 미국의 여러 연구자들이 앞다투어 이런 프로그램을 도입하게 됩니다.[7]

리비히는 본래 유기 화합물의 구성 원리를 밝히는 데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지난 글에서도 이야기했듯, 1830년대를 지나면서 여러 유기 분자의 작용 원리를 설명하는 데 실패한 그는 점차 회의적으로 변합니다.[8] 그리고 1840년대 초, 리비히는 대신“ 합성”에 초점을 맞추기로 결정하고, 연구실의 최정예 멤버들을 골라 이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깁니다. 당시 합성은 상대적으로 간단한 무기 화합물에 대해서만 가능하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리비히가 최초로 유기화학에 합성을 도입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이는 그간 유기화학 지식이 충분히 쌓였기 때문에 따라온 귀결이라기 보다, 조성 분석의 한계를 절감한 리비히가 유기화학의 원리를 탐구하는 새로운 길을 찾은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9]

“합성(Synthese)”이라는 단어는 1845년 리비히 연구실에서 나온 논문에서 최초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논문은 리비히

의 제자였던 존 블라이스(John Blyth, 1814-1871)와 호프만(August Hofmann, 1818-1892)에 의해 작성되었는데, 여기서“ 합성”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분해”의 반대 개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분석과 합성은 동일하게 스타이롤(styrole)과 메타스타이롤(metastyrole)이 같은 분율의 조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합성은 유기화학의 원리를 탐구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물론 합성을 통해 목표한 물질을 만들어 내는 것도 원리상 가능했지만, 아직 유기화학의 원리가 많이 밝혀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유기화학자들은 큰 기대를 걸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합성 실험은 목표를 두고 차근차근 수행된 실험이었다기보다, 적당한 시작 물질들로 반응을 시켜 어떤 물질이 나오나 보는 실험에 가까웠습니다.10 이를 통해 화학의 원리를 밝히는 게 더 중요한 목적이었던 것이죠.

하지만 그럼에도 합성 유기화학이 시작되면서 사람들은 그 가치를 금세 알아차렸습니다. 1840년대 화학자들은 “생성화학(constructive chemistry)”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단순한 물질들로부터 복잡한 목표 물질을 만들어내는 화학을 지칭했고, 1860년대 이후로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합성화학”이라는 단어가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19세기 화학 문헌을 분석한 한 연구11에 따르면, 1820년 기준으로 화학자들이 알고 있던 무기 물질은 1000개 이상 있었지만 유기 물질은 100개가 간신히 넘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유기 물질의 수는 9년마다 두 배로 증가한 반면, 무기 물질의 수가 두 배 증가하는 데에는 20년 이상이 걸렸습니다. 그 결과 1860년대가 되면 화학자들이 알고 있는 물질의 99%는 유기 물질로 채워지게 됩니다. 가히 합성 유기화학의 승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리비히의 왕국, 그리고 그 왕국을 모방한 다른 왕국에서 훈련받은 화학자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19세기 화학은 그 전성기를 구가하게 됩니다. 그리고 비록 리비히와 그의 동시대 화학자들은 화합물의 구성 원리를 밝히는데 흥미를 잃었지만, 여전히 그 원리를 탐구하고 있던 화학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갖은 노력으로 유기 화합물의 구성도 조금씩 설명되기 시작했죠. 다음 글에서는 원리를 탐구하던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참고문헌

  1. 이 내용은 다음 글들에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Alan Rocke, “The Rise of Academic Laboratory Science: Chemistry and the ‘German Model’ in the Nineteenth Century,” in A Global History of Research Education: Disciplines, Institutions, and Nations, 1840-1950, eds. Ku-ming (Kevin) Chang and Alan Rocke (Oxford, UK: Oxford University Press, 2021); Alan J. Rocke, “Origins and Spread of the “Giessen Model” in University Science,” Ambix 50 (1): 90-115 (2003); Frederic L. Holmes, “The Complementarity of Teaching and Research in Liebig's Laboratory,” Osiris 5: 121-164 (1989); J. B. Morrell, “The Chemist Breeders: the Research Schools of Liebig and Thomas Thomson,” Ambix 19 (1): 1-46 (1972).

  2. 독일 과학의 부상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김경만, 『과학지식과 사회이론』(한길사, 서울: 2004), 42-57쪽과 Alan Rocke (2021), 42-47쪽을 참조하십시오.

  3. 과학자(scientist)라는 단어가 처음 만들어진 것이 1834년입니다. 이후 전문화된 과학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이전까지는 자연철학자(natural philosopher) 등의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4. 김경만, 앞의 책, 52쪽에서 재인용

  5. 리비히는 1840년을 전후하여 개인적인 연구는 더 이상 진행하지 않고, 학생들의 연구를 지도하는 데 전념하였습니다.

  6. 물론 모든 학생이 다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리비히 연구실에 들어온 학생들 중 적지 않은 수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연구실을 떠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최정모 Jeong-Mo Choi


• 한국과학기술원 화학과, 학사(2003.3-2011.8)

• Harvard University 과학사학과, 석사

(2011.9-2015.5, 지도교수 : Naomi Oreskes)

• Harvard University 화학 및 화학생물학과, 박사 (2011.9-2016.5, 지도교수 : Eugene I. Shakhnovich)

• Washington University in St. Louis, 박사 후 연구원(2016.8-2019.4, 지 도교수 : Rohit V. Pappu)

• 한국과학기술원 자연과학연구소, 연구조교수(2019.6-2020.8)

• 부산대학교 화학과, 조교수(2020.9-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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