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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밀화학 분야의 개척자이자 과학기술계 리더



Ⅰ. 연구자로서의 기여


1. 귀국 전 연구경력

채영복 박사님은 1965년 독일 Ludwig-Maximilians-Universitaẗ Mun̈chen 대학교에서 유기화학으로 박사학위

(지도교수: Rolf Huisgen)를 취득한 후 2년간 Mun̈chen 소재 Max-Planck 세포화학연구소에서 노벨 생리학·의학상 수상자인 Feodor Lynen 교수 밑에서 알코올 탈수소효소의 작용 메커니즘에 관한 연구에 참여하였다. 그 후 도미하여 1967-69년까지 New York Medical Center 생화학 연구소에서 노벨 생리학·의학상 수상자인 Severo Ochoa그룹에서 m-RNA가 생체 세포 라이보솜 내에서 t-RNA와 상호 작용하에 염기 서열을 따라 단백질을 합성하는 메커니즘에 대한 연구에 참여하여 괄목할 만한 연구 결과를 얻었고『PNAS』에 논문을 다수 발표하였다. 그 후 유치과학자로 KIST에 합류하였다.


2. 귀국 후 연구경력


채영복 박사님은 1969년 8월 귀국 후 국내에서 생화학과 관련한 일련의 연구를 계속하기 위한 시도를 해 보았지만, 당시 국내에서는 그런 첨단 기초연구가 설 땅이 없음을 절감하고 포기하게 되었고 다시 유기화학 분야로 회귀하여 국내 산업이 필요한 산업화 연구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1969년부터 1981년까지 KIST에 유기합성 연구실 실장으로 우리 나라 석유화학공업 다운스트림 부문의 국산화 연구를 수행 하였고 특히, 그중에서 고부가가치 산업인 의약품 원제, 농약 원제 등 생리활성 화합물들의 국산화 연구를 수행하였다. 1960년대 말 우리나라 의약산업은 외국에서 원제(주성분 화합물)를 공급받아 tablet이나 capsule로 만들어 시판하는 기술 수준에 머물러 있었고 그나마 이런 제제화 기술도 외국 다국적기업들과 기술제휴를 통해서만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 대가로 원제를 매우 비싼 값으로 수입해야 하는 상황에 부닥쳐 있었고 이런 여건 속에서 1969년 말 채영복 박사팀이 이끄는 유기합성 연구실이 우리나라 처음으로 의약품 원제를 국산화하는 연구에 착수하였다. 당시 기업들은 이런 연구개발을 수행할 능력이 부족했고 대학의 연구 수준도 이에 미치지 못하여 이러한 연구개발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KIST 유기합성 연구실뿐이었다. 다행히 연구 결과들이 성공을 거듭하여 산업화로 이어지고 그 결과 국내 시장은 물론 동남아 여러 나라와 동구라파 나라에 수출이 시작되었다. 이 여파로 유기합성 연구실엔 연구를 수탁하려는 기업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게 되었고 당시 수행하여 국산화한 연구의 종류나 수는 일일이 다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하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KIST 유기합성 연구실은 그 규모가 빠른 속도로 팽창하게 되었으며 많은 유치과학자가 합류하게 되었고 이들이 몇 년 후 독립하여 연구실을 차려 나감으로써 연구실이 연구부 규모로 성장하여 나갔으며 훗날 화학연구소로 이전하면서 연구소 규모로 확장되기에 이르렀다. 그뿐만 아니라 많은 연구원이 산업계로 스카우트되었고 그 결과 기술의 확산 속도가 가속화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채영복 박사님이 이끄는 유기합성 연구팀의 연구 결과가 국내 산업계에 큰바람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외국의 다국적기업들이 자기들의 이익 침해 문제와 관련하여 통상 압력으로 작용하였다. 성장 초기에 있는 우리나라의 정밀화학 산업에 물질특허제도가 도입되면 아 무리 새로운 프로세스 혁신을 하여도 생산으로 이어질 수 없게 되며 기업 성장에 막대한 악영향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래서‘이들 산업이 미국 등 여러 나라에 의해서 프로세스 혁신 과정을 통해 거쳐 왔듯이 우리 기업이 스스로 자본을 축적하여 신물질 창출을 할 수 있는 여력이 생길 때까지 물질특허를 도입해선 안 된다’는 논리로 반대 운동을 전개하여 우리나라 정밀화학 산업화를 앞당기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KIST 유기합성 연구실에서 시작한 이 작은 연구 성과들이 모여 하나의 큰 나비효과를 만들어 냈다.


Ⅱ. 연구 관리자로서의 기여


1. KIST 연구실장, 연구부장과 화학연구소 원장 재직 시의 역할


채영복 박사님은 1969년 KIST 유기합성 연구실장으로 그 후 KIST 응용화학 연구부장과 1982년부터 1993년까지 11년간 한국화학연구소장을 4번 연임하였고 그동안 연구 관리자로서 수행한 많은 역할 중 대표적인 것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정밀화학 공업육성방안 입안


생리활성 물질의 국산화 연구가 호조를 이루고 있을 1979년경 채영복 박사는 이 여세를 몰아 이 분야 산업 발전을 위한 국가 차원의 진흥방안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 분야 제품들이 수익성은 매우 좋으나 다품종 소량 생산 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어서 어느 한 품목을 내세워서 육성방안을 마련하기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고심 끝에‘유기 합성’이란 공통점을 지닌 품목들을 한데 묶어 하나의 큰‘산업군’을 만들고 이 산업군의 육성방안을 마련하는 방향으로 접근하게 되었다. 염료, 계면활성제, 각종 첨가제, 광학활성 물질, 의약품, 농약 등을 한데 묶어 산업군을 만들고 이 산업군의 명칭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하다가 정밀한 화학이라는 의미로 정밀화학이라 명명하였다. 오늘날 흔히 쓰이고 있는‘정밀화학’이란 이름은 이러한 경로를 거쳐서 채영복 박사님이 만들어 낸 용어이다. 외국에서 쓰이는 fine chemical이나 specialty chemical과는 다른 전략적인 의미가 가미된 차별화 된 용어이다. 1981년 이런 과정을 거쳐‘정밀화학공업육성방안’이 마련이 되었고 1982년 6대 국책사업으로 확정되었다. 그리고 이 육성방안에 따라 우리나라 제3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에 처음으로 정밀화학 분야가 수록되기 시작하였다.


2) 신물질 창출 연구사업의 시동


의약, 농약 등 생리활성 물질들의 국산화 연구가 1969년 부터 1981년까지 KIST를 중심으로 이어졌다면 신물질 창출 연구는 한국화학연구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1980년대 중반 우리나라는 아직 외국의 범용기술들을 들여다 생산 판매하는 기술 수준에 있었는데 이런 시기에 채영복 박사님을 중심으로 한국화학연구소에서 우리나라 처음으로 신물질 창출 연구의 시동을 걸게 되었다. 결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한국화학연구소 내에 신물질 창출에 필요한 제반 연구시설 구축과 연구추진에 필요한 재원 일체를 국가에서 조달해 주기로 약속을 얻어냈다. 신물질 연구동 (훗날 채영복 관으로 명명됨)을 포함하여 안정성 연구동 (독성 연구), 실험용 동물사육시설, 의약품과 농약 스크리닝 연구동 등의 시설을 화학연구소 내에 확보하였고 연구에 필요한 소프트머니도 별도로 확보하였다. 이렇게 해서 재원 확보 문제는 해결되었으나 나머지 문제인 필요한 연구시설들을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 이들 시설을 건설한 후에 이를 활용하여 연구를 수행해나가는 데 필요한 요소 기술들은 어디서 가져다 충당할 것인가, 그리고 필요한 전문 인력을 어떻게 확보해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가 크게 대두되었다. 당시 국내에는 이런 시설을 만들어 본 경험자도 없었으며 이런 분야에 연구 경험을 지닌 전문가가 없는 상황이었다. 채영복 박사님은 황무지였던 의약품, 농약 등 생리 활성물질의 국산화 연구를 통해 일차적으로 우리나라에 유기화학공업 더 넓게는 정밀화학공업의 기반을 다지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이어서 우리나라가 새로운 의약품, 농약 등 신물질을 창출하는 연구 기반을 구축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3) 정밀화학 공업진흥회 설립


채영복 박사님은 정밀화학을 육성하려면 민간 부문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고 판단 관련 기업들이 참여하는 ‘정밀화학 공업진흥회’를 설립했다. 염료, 계면활성제, 의약, 농약 등 관련 기업은 물론 화학 관련 대기업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했으며 이를 통해 정책개발과 다양한 발전계획을 수립하여 대정부 건의를 하는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 조직은 현재 산업자원부 산하 기관으로 정밀화학 산업진흥회로 개명되어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활발한 사업을 추진 중이다.


4) 신약 연구조합의 설립


신약 연구조합은 제약회사 중 신의약개발 (신물질 창출)을 지향하는 기업들을 중심으로 창설하였으며 아직도 신물질 창출의 중심에서 매우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김완주 박사 등이 실무에 참여했다).




2. 기초기술연구회 이사장과 과학기술부 장관 재임 시의 업적


1) 국가과학기술 로드맵 작성


기초기술연구회 이사장으로 재직하던 1999년부터 2001년 말까지 3년 동안 KIST, 생명과학연구원, 천문연구원 등 기초기술연구회 산하 연구소들을 과거의 모방 구에서 탈출, 선도 연구 분야로의 진입을 위해 전환점을 마련해주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서 국가 과학기술 로드맵을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이 사업은 각 분야 연인원 수천 명이 동원 되어 채영복 박사님이 과기부 장관으로 부임한 후까지 계속 하여 완성되었다. 이 로드맵은 10년을 내다본 미래지향적인 연구 방향과 연구내용이 총망라해서 수록되었으며 그 양이 수천 페이지에 달하고 범 부처 참여로 만들어졌다. 우리나라 초유의 국가 차원의 과학기술 로드맵으로 훗날 연구비 배정과 연구 방향 설정 등에 참고 자료로 이용되었다.



2) 과학기술인 공제회 설립


과학기술인 공제회는 연금 혜택을 받지 못하던 정부출연 연구소 연구원과 민간연구소 연구원들의 노후대책을 위해 설계된 것으로 2002년 채영복 박사님이 이 제도를 발의할 당시까지만 해도 정부출연연구소 연구원들은 연금제도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의 노후대책 마련이 절실 하였으나 정부의 재정 관련 부처는 국민연금 등을 이유로 별도 연구원 연금제도 마련에 비협조적이었다. 그래서 이들의 반대를 우회하여 과학기술인 공제회를 출범시켜서 정부 출연연구소 연구원들과 민간연구소 연구원들의 연금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올해로 설립 20주년을 맞는 이 과학기술인 공제회는 자산운용 규모가 약 20조 원에 육박 하는 기관으로 성장하여 명실상부한 과학기술인 복지 전담 기구로 성장하고 있다.


3)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UST) 설립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는 연구소의 하부 연구원들을 대학원 학생으로 대체하여 연구소 연구에 참여하도록 하고 학위 취득 후 산업계 등으로 취업시킴으로써 하부 연구인력 수급의 유연성과 유동성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설립되었다. 이는 채영복 박사님이 기초기술연구회 이사장 재임 시절에 의원 입법으로 법제화하여 추진되었고 과학기술부 장관 재임 시에 공식 출범하였다. 당시 국회 정무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김부겸 국회의원이 발의하여 법제화를 도와주었고 이제 설립 20주년을 맞고 있다.


4) 이공계 기피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 시행


채영복 박사가 장관으로 부임한 시기는 김대중 대통령의 임기 말기에 해당하며 김영삼 정부 시절에 초래된 외환 위기 사태로 인해 사회 각계의 구조조정 작업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민간 부문을 포함한 과학기술계 인사들이 대거 구조조정 대상이 되어서 가장 큰 피해를 보게 되었다. 이 여파로 학부모가 앞장서서 자녀들의 이공계 지망을 가로막는 상황이 되었다. 청소년들의 이공계 기피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가지 다양한 정책 대안이 마련되었으며 그중 하나가 현직에 있는 과학기술인들의 처우를 획기적으로 개선하여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귀감이 되게 하고 이를 통해 청소년들의 이공계 진출을 선호하게 하자는 방안이 마련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과학기술인 공제회의 설립도 이런 맥락에서 추진되었으며 이외에도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건립과 대한민국 최고과학기술인상, 이달의 과학기술인상, 이달의 엔지니어상, 여성 과학자상 등 각종 포상 제도를 도입하였고 대학원 진학 학생들을 대상으로 국가장학생 제도 등을 실시하였다.


5) 한국파스퇴르 연구소 설립


김대중 정부에서 추진한 서해안 물류센터 건설계획의 일환으로 물류센터에 과학기술을 접목하여 부가가치를 제고하고자 하는 방안으로 채영복 박사님에 의해 제안 되었으며 외국의 유명한 공공연구소와 민간연구소들을 유치하여 배치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추진되었다. 외국의 연구소를 유치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혜택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서는 이들을 별도 수용할 수 있는 과학기술 특구의 마련이 필요한 것으로 판단되었고 이 안이 발의되어 국가과학기술위원회에 부의하여 통과되었다. 그리고 유치 우선순위에 오른 것이 공공부문에서 프랑스의 파스퇴르 연구소였다. 과학기술 특구의 개념은 이런 철학 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2002년 채영복 장관이 파리에서 한불 과학기술 장관 회의를 마친 후 파스퇴르 연구소 유치 문제를 프랑스 과학기술부 장관과 논의하여 유치에 원칙적인 합의를 하였다. 그 후 실무 작업으로 박호군 당시 KIST 원장과 그 후임인 김유승 KIST 원장이 후속 실무를 맡아 유치작업이 완료되었고 현재 판교에 한국 파스퇴르 연구소로 설립되어 운영 중이다.












학 력


•1955

경동고등학교 졸업

•1959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화학과 졸업

•1959

서울대학교 대학원 입학

•1959-1965

서독 Ludwig-Maximilians-Universitaẗ Mun̈chen 대학교 화학과 Diplom 과정 입학(1959)/Diplom 과정 졸업(1961)/유기화학 으로 이학박사 취득(1965, 지도교수: Rolf Huisgen)



경 력


•1965-1967

Max-Planck 세포화학 연구소 연구원(노벨 생리학·의학상 수상자 Feodor Lynen과 지방합성 과정의 알콜 탈수소효소의 작용 메카니즘 연구)

•1967-1969

New York Medical Center 생화학 연구소 연구원(노벨 생리학·의학상 수상자 Severo Ochoa 교수와 생체 세포 내에서 m-RNA로부터 단백질 합성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라이보솜과 aminoacyl t-RNA 그리고 m-RNA의 염기 서열 간에 상호작 용에 관한 연구. Peptide가 생합성되는 과정에서 라이보섬 내의 단백질 합성 개시를 명령하는 initiation factor F1, F2, F3의 작용 메카니즘 연구)

•1969 KIST 유기합성 연구실장

•1971-1980 KIST 응용화학연구부장

•1982-1993 한국화학연구소 소장(4연임)

•1994-1995 대한화학회 회장(29대)

•1995-1997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사무총장, 부원장

•1999-2001 기초기술연구회 이사장

•2002-2003 과학기술부장관

•2004-2010 한양대학교 석좌교수

•2004-2013 한국파스퇴르연구소 이사장

•2005-2007 국기과학기술위원회 민간위원

•2005-2008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회장

•2008-2013 대통령 직속 국가원로회의 위원

•2010-2014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이사장(초대)

•2011-2014 학교법인 상지학원 이사장

•2009-현재 (사)원정연구원 이사장



상 훈


•1972 국민 포장

•1975 보사부장관상

•1976 국민훈장 동백장

•1997 운경상(운경재단)

•1980 3.1문화상

•1998 효령상

•2004 프랑스 정부 최고 훈장‘레지옹도뇌르’수상

•2006 청조근조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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