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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빛낸 화학자 ⑨

故 윤능민(尹能民)서강대학교 교수(1927~2009)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 언덕 위에 백합... 네

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故 윤능민

교수님의 애창곡이었다. 훤칠한 키에 중후한 체격 그리고

온화한 웃음을 머금은 얼굴의 선생님은 후배 교수들에게

모범적인 선배님이셨고 학문적으로는 항상 진지하게 열

심히 연구하시는 훌륭한 과학자셨다[故 진종식 교수님(35대 대한화학회 회장)의 추모 글에서 일부 발췌].

故 윤능민 교수님은 1927년 대동강 인근에서 출생하셔

서 1945년 2월에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시고 홀로

집을 떠나 경성대학(현 서울대학교) 예과에 입학하였고,

1951년 3월에 문리과대학 화학과를 졸업하셨다. 이후 카

톨릭의과대학에 교수로 임명되어 9년간(1954-1963) 화

학을 가르치셨다. 선생님께서는 대학교수라는 매력적인

위치에 올라 있었지만 학사 학위에 머물러 적당히 안주할 수 없었고, 카톨릭의과대학을 떠나 유학을 결심하게 된다. 만 36세의 만학의 나이로 미국 Purdue대학교 화학과로 유학을 떠나 Herbert C. Brown 교수의 지도아래 대학원 과정을 밟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Brown 교수는 붕소(B)와 알루미늄(Al) 수소화물을 이용한 유기 작용기의 환원반응과 불포화 탄화수소 화합물에 붕소수소화물을 첨가하는 반응의 발견으로 전세계적인 관심을 받고 있던 중견학자로서 유태인계 미국인이다. 매사에 섬세하고 꼼꼼하면서 끈기 있는 선생의 성격에 잘 맞는 연구분야이기도 하였다. 더군다나 유태인은 여러 가지로 한국인과 유사한 사고방식이나 생활습관을 지니고 있어 스승에 대해 예의 바르고 공손하며 매사에 열심히 노력하는 선생에 대해 Brown 교수는 각별한 신뢰를 지니고 있었다.

1979년도 노벨 화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Brown 교수가 수상 강연회에서 선생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는 등 여러 면에서 선생님을 아끼고 우대하는 등 돈독한 관계를 보여주었다[차진순 교수님(41대 대한화학회장)의 추모 글에서 일부 발췌].

선생님께서는 박사 학위 후 한국에 돌아와서 1968년 서강대에 자리를 잡으시고 금속수소화물에 의한 유기화합물의 선택환원반응 연구에 일생을 바쳐 오셨다. 100여편의 논문을 발표하셨으며, 특히 Borane에 의한 유기산의 환원연구, 비대칭합성에 관한 연구, 유기산의 에스테르로부터 해당하는 알데히드를 0 ℃에서 정량적으로 얻을 수 있는 새 수소화물인, NaEt2(Py)AlH의 개발 연구, BER-Ni(OAc)2의 환원 및 라디칼 반응 등은 국제적인 학술지에도 자주 인용될 만큼 세계적으로도 높이 평가 받아 우리나라의 유기화학분야 학문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훌륭한 연구업적과 과학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3년 국민훈장 목련장, 1990년 대한민국 과학기술상, 1993년 대한민국 학술원상, 1995년 인촌상을 수상하셨다.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그리고 한림원의 종신회원으로 마지막까지 봉사하셨다.

선생님께서는 화학분야의 최초 과학재단 지정 우수연구센터의 하나인 ‘유기반응센터’를 조직하였다. 선생님 본인이 소장을 맡고 강재효(서강대), 강성호(KAIST), 김관수(연세대), 김성각(KAIST), 서정헌(서울대), 심상철(KAIST), 이은(서울대), 이종건(부산대), 정봉영(고려대), 차진순(영남대) 등이 참여하였다. 이 센터는 매 3년마다 실적을 평가하여 9년까지 2회 연장할 수 있는 대형사업으로 우리나라 유기화학 분야의 연구를 국제적 수준으로 끌어 올리려는 정부의 과감한 수월성 위주 프로젝트였다.

센터의 연구원들은 매우 우수한 연구성과를 기록하여 최대 유지기간인 9년을 채우는 큰 역할을 하였다. 선생께서는 한국의 화학 기술의 국제위상을 제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다. 특히 선진국과의 기초연구 수준의 격차에 대해 우려를 하고 어떻게 하면 이를 극복할 수 있을 지에 대해 고심하셨다. 1980년에 들어서 ‘제1회 한-일 유기화학 심포지엄’이 서울에서 개최되었고, 매 2년마다 한국과 일본에서 번갈아 열리게 되었다. 선생께서는 학회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셨다. 1978년도에는 대한화학회의 살림살이를 책임지는 간사장으로 봉사하였고, 대한화학회 이사 및 간사에 이어 1989년도부터 2년간 대한화학회 회장을 맡아 학회를 크게 발전시키고 학회 회원의 학술 활동을 증진시키는데 큰 업적을 남기셨다.

1968년에 서강대 화학과에 부임하신 교수님은 정년 퇴임 후에도 10년 가까이 연구교수로 재직하시면서 후학을 육성하셨고 우수 연구결과를 많이 발표하셨다. 후배 교수들에게 교수의 본분과 교수의 갈 길을 솔선수범으로 보여주셨고,학생들에게는 배움의 기쁨을 맛보게 인도하시며 연구의 성취감을 느낄 수 있게 밀어주셨다. 교수님은 후배 교수들과 대화를 즐기셨으며, 지방에서 학회가 있을 때는 후배 교수들을 태우고 장거리 자동차 운전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인생을 재미있게 그리고 긍정적으로 사셨다[故진종식 교수님(35대 대한화학회장)의 추모글에서 일부 발췌].

30여년간의 연구 과정에서 박사 14명, 석사 55명의 학문 후속세대를 양성하셨다. 선생님께서는 연구를 이야기할 때 논리적이지 못하거나 주제를 이해하지 못할 때 매우 무서운 스승이셨다. 그래서 외경이라는 단어가 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평상시에는 제자와 같이 술을 즐기시고 제자를 걱정하고 아끼시는 진정한 스승이셨다.


글 광주과학기술원(GIST) 화학과 안진희

[출처 대한화학회 유기분과회 뉴스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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